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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15, 2022

논문 초안을 쓰며 느낀 점: 책임있는 글쓰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법

작년 말에 연구를 마무리하고 논문으로 정리하자고 하셔서 인트로 및 부록 빼고 본문까지는 대략 써 보았었다. 그때 내가 임의로 해서 교수님께 가져간 목차를 교수님도 거의 비슷하게 구상하고 계셨어서 기분이 좋기도 했었다. 내용을 소개하는 방식이 straightforward하지만은 않은데 꽤 구체적으로 비슷했어서 신기했던 기억이다.


하지만 그 이후 약 아홉 달 동안, 기존 내용을 refine하고 추가적인 연구 내용 (efficiency at maximum power (EMP)) 을 얻느라 섭밋 계획을 한번 엎었다. 그 사이에 새로 얻은 EMP 쪽을 메인으로 해서 이번 3-4주간 거의 새로 쓰다시피 했고 연휴 직후에 교수님께 보내드렸는데, 이번엔 정말로 마무리하자는 느낌이시다.


초안을 써 보면서 여러가지 느낀 게 있다. 먼저 영문으로 이정도 분량의 글을 써 본 건 사실상 처음인 탓에 (학부 졸업논문들이랑 인문대수업 리포트들도 전부 국문으로 썼음), 내가 쓴 글임에도 글의 전모가 한 눈에 들어오진 않아서 불안감은 가지고 있다. 아마도 아카이브에 올리기 전까지 교수님께 피드백 받는 과정에서 계속 살펴보면, 좀 더 이 원고와 친해져서(?) 한 눈에 이슈들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본문에서는 그냥 내가 연구한 내용을 잘 표현하면 되니까 좀 테크니컬한 고민들이랑 수식 입력의 귀찮음 위주로만 있었다면, 좀더 고차원적인 창작의 고통(?)은 인트로 부분에서 주로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쓰기 전에 막연하게 걱정되던, 혹은 다른 논문들 읽으면서 '와 이런걸 번거로워서 어떻게 하나' 싶어서 걱정했음에도 막상 써 보니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게 레퍼런스 다는 것. 다른 논문들의 레퍼런스 보면 기본 50-60개는 되는 느낌이라 처음에는 저걸 대체 어떻게 하지 싶었는데, 첫 연구를 그래도 몇년 붙잡고 있었다 보니, 정말 직접적인 참고가 되는 문헌만 정리해도 30-40개 정도로 생각보다 적지 않게 나오더라. 여기에 직접적인 방법론적 참고는 안 되더라도 연구사적 맥락에서 반드시 인용해야 하는 논문들 및 설명이 잘돼있는 리뷰 논문들을 인용하고, 20세기 초반에 쓰인 근본 논문들도 방법론 언급할 때 예우 차원(?)에서 인용하면, 50-60개는 억지스럽게 채운다는 느낌 없이도 금방이다.


그런데 우리 교수님이 원생/포닥 때 작성하신 논문들을 보면 인용을 같은 업계에 비해서 정말 무척 적게 하시는 편인듯하다 (주도적으로 쓰신 논문에서는 30개 미만 인용하신 경우가 많음). PPT 같은거 봐 주실 때도 과장된 표현이나 레토릭한 표현을 지양하시는데 이런 것과 뭔가 일관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게도 그런 방향으로 지도를 해주실지도 궁금하기도 하다.


다음은 유사도 문제. 워낙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가 많길래 고통을 받을것으로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전혀 그렇진 않았다. 아무리 본문이 아닌 선행연구조사 부분이더라도, 내가 원하는 딱 그 맥락과 뉘앙스에 exact한 문장이 다른 논문들에 많이 있는 게 아니라서, 다른 논문을 일단 긁어오자는 생각 자체가 안 들고 내가 직접 써서 다듬게 되더라. 간혹 정말로 질투날 만큼 맘에 쏙 드는 문장들도 있긴 한데, 확률상 대부분은 내가 필요로 하는 문장들이 아닌지라 그냥 기억하고 기록만 해둔다.


결국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게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해봤다면, 표절을 피하는 것은 내가 갖고있는 문장을 억지로 paraphrasing하는 힘든 과정이 아니라, 나쁜 마음 먹지 않는다면 나름 자연스레 이뤄지는 과정인듯 (반면에 예술창작, 특히 음악에서는 훨씬 어려울 것 같음).


우리 active matter 분야에서는 과장좀 섞어 모든 논문이 거의 똑같이 시작하는데 ("active matter는 개별 입자의 수준에서 주변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하여 운동으로 전환시키며 와글거리는 물질이다" 이 정도의 뜻), 이런 건 약간 예외적일 수도 있겠다. 다만 이런 것조차도, 다른 논문들의 문장을 직접 참고하되 표현을 바꿔 쓴다는 느낌이 아니라, 뜻의 덩어리를 머리속에 기억해두고 그걸 글에 녹여낸다는 느낌으로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게 잘 할수 있다. 만약 100년 동안 연구가 쌓인다면 정의는 그대로인데 표현의 가짓수는 한정적이니 표절문제가 생길수 있겠지만, 그때는 연구 트렌드가 달라져서 첫문장이 달라지겠지(...).


카피킬러 같은 건 아직 안 해 보았고 교수님의 피드백과 첨삭까지 마치면 해볼 예정이다. 글쓰기에 있어서는 스타일이 확고하시고 굉장히 꼼꼼하셔서 아마 많이 바뀌어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실제로 무척 인자하고 점잖은 분이신데, 교수님 말씀으로는 대학원생때 유일하게 짜증나셨을 때가 동료 논문 첨삭해 줄 때였다고 하신다.


그리고 연구노트 좌측여백을 사실상 영어 단어장처럼 사용하고 있다. 나는 맘에 쏙 드는 단어가 보이면 어떻게든 내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데 (이것은 페북이나 블로그에 글을 쓸때도 마찬가지임) 그러다보니 언젠가 내 글에 써먹으려고 적어두게 된다. 텝스 공부할 때도 단어 억지로 외우는걸 제일 힘들어했는데 (사실 제대로 안하고 청해/독해점수로 비볐음...), 글쓰기라는 목적이 있으니 영단어 공부도 자연스럽게 되는구나 싶다.


그리고 그런 단어들이 과연 맥락에 맞는 뜻인지를 보려면 영영사전을 찾는 게 매우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예문도 예문이지만, 뜻이 정확히 논리적으로 해설된 걸 보는 것도 생각보다 꽤 유용하다. 이를테면 내가 정의한 어떤 양을 여지껏 composite efficiency라고 이름붙이고 사용해 왔는데, 찾아보니 composite가 내가 생각하던 그런 뉘앙스와는 좀 다른 뜻이라, 영영사전을 찾아가며 comprehensive efficiency로 바꾸게 된 일이 있다 (물론 교수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실진 모른다). 그리고 남의 논문 읽을 때도, 그냥 수식 따라가며 공부하는 입장이 아니라 논문을 써야되는 사람 입장에서 읽으니까 예전과 달리 어휘 같은 게 눈에 좀더 들어오는 듯.


아무튼 첫 연구는 교수님이 하사해주신 토픽이지만 내 맘에 쏙 드는 지적 방향성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갈피를 못잡던 시간이 길어서 연구가 늦어지다 보니 슬슬 비슷한 문제의식의 논문이 많이 나와서 연구가 처음보다는 덜 novel하게 된 느낌인데... 그 논문들이 모르고 있는 걸 내가 아는 게 아직은 꽤 남아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시간문제겠다 싶어서 초조한 기분이 많이 든다. 이젠 정말로 빨리 제출하고 다음 연구주제로 넘어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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