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했던 생각인데, '사과의 개수를 세는 것'을 흔히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수학의 클리셰적인 예제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굳이 따지면 자연수라는 형식체계를, 이산화하기 쉬워서 자연수로 잘 기술되는 사과라는 현실세계의 대상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엄연히 가장 원초적인 '물리학'에 해당하는 것 같다.
물론 수학교육에서 현실 예시를 들어가면서 하는게 학습에 중요하다거나 하는 게 있을 테니... 사과의 개수 세기를 진짜로 과학교과서로 옮겨야 된다는 건 아니고, 그냥 내 머리속의 농담 같은 관념적 재분류일 뿐이다.
그런데 사실 내 전공분야인 통계물리학 또한 결국에는 개수를 세는 것이다. 시스템의 디테일에 크게 상관없이 개수만 잘 세어도 꽤 많은 물리적 성질들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있다.
물리학이라고 하면 뭔가 시공간 위에서 연속적인 것을 다루기 위해 미적분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데, 개수 세는 것만으로 물리를 할 수 있다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사실 그 spirit은 사과의 개수를 세는 원초적인 물리학에서부터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통계물리학에서는 대상의 개수를 세는 게 아니라 그 대상들의 배열이 이루는 state의 개수를 세는 것이므로 조금 더 추상적이기는 하다.
이게 공연히 오랜만에 다시 생각난 이유는, 요새 지인에게 Gibbs paradox를 공부해서 소소하게 가르칠 일이 있어서, 개수를 세는 것에 대해 계속 고민하다 보니까 그랬던 것이다.
Gibbs paradox는 입자들이 이루는 상태의 개수를 셀 때 입자 종류의 구분불가능성 (쉽게 말해 순열permutation을 조합combination으로 바꿔주는) 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두 종류의 기체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가 섞일 때 엔트로피가 증가하는지 여부와 관련된 paradox of mixing과도 궁극적으로 동일한 문제인데,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들이 많아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굉장히 흥미롭다.
이에 대해 내가 통계역학을 여러 해에 걸쳐 접하면서 나름대로 고민해서 가지게 된 결론의 얼개가, Jaynes라는 물리학/통계학/정보이론 쪽에서 유명한 분의 견해와 거의 같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어서 꽤나 뿌듯하기도 했다.
그 결론을 대략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입자들이 구분불가능한지 여부를 다르게 생각했을 (think different) 뿐인데 엔트로피라는 물리량이 바뀌는 (physics does change) 것은 굉장히 이상해 보인다. 예를 들어 까만색 입자와 흰색 입자를 우리가 구분해서 보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두 종류의 입자들이 섞일때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근데 구분 안하고 통째로 보겠다고 마음먹으면, 서로 섞여도 엔트로피는 증가하지 않는다. 엄연히 객관성을 기해야 하는, 그리고 실험으로 측정이 가능한 physical quantity인데 주관에 따라 달라진다니? 이게 우리가 흔히 역설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일테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구분불가능 여부를 전적으로 임의로 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시스템을 관찰하는 device의 해상도 내지는 형식에 따라서, 구분가능성의 여부는 어느정도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그 세팅 하에서 physical quantity의 측정값을 설명하는 가장 유용한 effective theory가 무엇인지도 정해진다.
단, 이때 주어진 해상도 내지는 형식 하에서 입자의 종류에 대해 얼마든지 얻을수 있는 정보를 일부러 무시하면 안되고 최대한 다각도로 조사를 해야 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하면 think와 physics 외에도 probe 라는 새로운 층위가 들어오게 되고, 여기서 probe different -> physics does change 는 비교적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다면 think 부분은 어떻게 되는 건가? 내 생각에 think를 완전히 임의로 할 수가 없고 우리가 가진 probe의 형식에 알맞게 올바르게 think해야 하며,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이론은 우리가 가진 probe 상에서의 올바른 physics를 준다. 그리고 probe가 바뀌면 그에 맞게 physics가 바뀌는 것 같다.
예컨대 나는 만약에 원자 하나하나에 이름표를 붙이고 그것들의 운동을 일일이 쫓아갈수 있다면 열heat은 모두 일work이 되고, 우리가 흔히 보는 스케일에서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0^23개 기체 입자에 서로 구별되는 이름을 붙이려면 최소한 원자 76개 길이의 binary sequence 꼬리가 필요하고... 그런데 충돌 전후에도 그 꼬리표가 안 파괴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꼬리표의 크기가 훨씬 커야 할 것이고...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왠지 저런 일이 근본적으로 forbidden되는 이유가 있을 듯. 아닐 수도 있고 말이다)
또한, 두 종류의 기체 입자가 서로 무게가 다르다거나 (심지어 고전적인 공(ball)들인데 색깔(!?)이 다르다거나) 해서 혼합 전후에 물리현상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으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실험해 보면 그 차이는 측정이 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일부러 무시하고 구분불가능하다고 하는 건 wrongly think different하는 것 같다. 이것은 다름아닌 mixing paradox로서, 바로 위 문단에 말한 예시보다 조금 더 미묘한 듯하다.
Gibbs paradox로 돌아오면, 자유 공간을 떠다니는 이상기체 분자들에서 엔트로피를 1/N! 으로 나눠 주는 게 양자역학적 입자들의 구분불가능성 (identical particles) 때문이라고 하는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일단 눈에 보일 정도의 기체 덩어리는 완전히 thermalize 되어 있고 전혀 coherent하지 않을 텐데 양자적 구분불가능성이 과연 relevant할지 살짝 의문이기도 하거니와 (이부분은 그냥 내가 양자를 잘 몰라서 그런 듯), 사실 꼭 coherent한 wavefunction으로 기술되는 양자역학적 입자가 아니더라도, 입자의 종류 차이가 우리가 가진 device에서의 measurable physics에 영향을 안 준다면 얼마든지 구분이 불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럴 때에는 양자역학적 입자들과 마찬가지로 계산상으로도 구분을 안해주는 게 맞는 듯하다.
원자나 분자 같은 기본 입자들의 살짝 특별한 점은, 축구공이나 농구공처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조금씩은 다른 일상 속 거시적 물체들과 달리 (애초에 그런 물체들이 따로따로 떠다니면서 10^23개씩 모여 있을 수 없기는 하지만) 정말로 fundamentally identical해서 probe의 해상도에 무관하게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것.
물론 극히 최근에는 Gibbs paradox를 resolve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일본의 Shin-ichi Sasa 교수님의 연구팀에서 2021년에 Journal of Statistical Physics에 게재한 논문(Quasi-static Decomposition and the Gibbs Factorial in Small Thermodynamic Systems, 링크)을 비롯한 대안적인 논변들도 있다. 이 부분은 잊어버려서 한번 더 살펴봐야겠다. 아무튼 이런 게 아직도 연구 중인 open question이라는 점이 인상깊다.
이렇듯 개수를 어떻게 셀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문제가, 비가역성과 열역학 제2법칙의 근원이라는 통계역학의 가장 근본적이고 머리아픈 문제와도 연관이 되어 있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여담이지만 나는 현재 주목받는 딥러닝이 대체 왜 이렇게 성공적인지에 대해서도, 디테일을 제하고서도 고차원 공간에서의 counting을 통해 약간은 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근거가 되는 연구 리포트들도 있다. 통계물리학을 이용하여 딥러닝의 작동원리를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성공적 시도들이 꽤 많은 것도, 바로 이런 공통점 때문이 아닐까 상상을 해 본다.
흔히 양자역학에서 관측 여부에 따라 물리가 달라지는 게 이상하다, 관측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Gibbs paradox 문제가 비가역성의 근원 문제와 연결되는 지점을 비롯한 여러가지 통계역학적 고민들이야말로, 양자역학의 관측 떡밥에 만만치 않게 미묘하고 재미있으면서, 우리의 거시적이고 일상적인 고민들 (microstate와 macrostate를 정의하는 문제 -> 로또번호 다른 것들은 잘만 나오면서 123456은 왜 안나올까 등등) 과도 훨씬 깊게 연관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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